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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독창성과 간결함, 전략성이 한데 모인 작품 [헬베티아] (Helvetia / 2011)

중립국인 스위스. 전 세계를 경천동지하게 만들었던 2차 대전의 포화도 피해갔던 스위스이지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전권을 잡았을 당시에는 이 스위스도 역시 타국의 무력에 휩싸였던 역사가 있습니다. 이때 '헬베티아 공화국'이 된 스위스는 나폴레옹의 철수 이후 '헬베티아 연방 공화국'이 되었죠. 평화 속에 안주했던 헬베티아 연방 공화국의 주민들에게는 재건이 지상과제가 되었습니다. 산악들로 연결된 먼 마을들은 필사의 각고로 교류를 하며 다시금 부요함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글렌 모어], [랭카스터]의 디자이너인 마티아스 크라머의 2011년작 [헬베티아]의 배경입니다. 스코틀랜드, 영국에 이어 그가 선택한 유럽의 국가는 바로 스위스입니다. 파란만장한 배경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게임으로, 그의 전작들이 좋은 반응을 얻었기 때문에 초유의 관심속에 발표된 작품이었죠. 사실 규칙은 그의 이전작들과 비교해서 그 수준이 거의 대등할 정도의 난이도입니다.

 

게임의 규칙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은 전형적이라고 할만한 수준들입니다. 각 턴에 플레이어들은 선택할 수 있는 다섯 가지의 직업중 하나를 골라 해당 액션을 취합니다. 갖고 있는 코인의 갯수만큼 선택을 할 수 있고, 선택한 액션에 따라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건물을 짓거나, 생산 후 배달을 하거나, 일꾼을 더 늘리는 등의 액션이 가능합니다. 일꾼의 상태가 중요한 게임이기도 해서, 생산 후에는 쓰러져 잠을 자고 (진짜로 피겨를 쓰러뜨립니다), 나중에 생산을 위해 깨우기도 하는데, 이를 전담하는 야경꾼 (Nightwatcher) 이라는 별도의 액션이 있을 정도입니다.

더 많은 액션을 도모하기 위해서 일꾼을 늘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일꾼 피겨들을 성별이 구분되어 있는데, '주교' 액션을 통해서 다른 플레이어의 성이 다른 피겨와 가약을 맺을 수도 있고, '산파' 액션을 통해서 새로운 일꾼을 만들 수 도 있습니다.
 

물론 게임의 모든 액션은 점수 획득을 지향해야 합니다. 제품 배달하기, 건물을 지어 점수 얻기 등으로 획득한 점수는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확인하며, 누군가가 20점을 넘었다면 게임은 끝나고 최고 득점자가 승리합니다.


아마 이런 요소들만으로 게임의 방법을 가늠한다면 [헬베티아]는 굳이 회자할 만한 게임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디자이너인 크라머는 추가적인 몇몇 요소들로 이 게임에 나름의 개성을 부여했는데, 특출날 정도로 기발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소소한 시도들이 모여 이 게임만의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데는 성공했습니다.


일단 생산되는 제품들이 있고, 건축이나 점수 획득을 위한 사용 용도가 존재함에도 제품의 표시를 위한 별도의 콤포넌트가 없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2011년 에센 당시 보드게임긱과의 인터뷰에서도 크라머 자신이 이 점을 특징으로 강조한 바가 있죠. 플레이어들은 생산 가능한 자원들을 염두하고 있되, 이를 반드시 생산과 동시에 사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이 게임에는 생산된 제품을 적재하는 개념이 없습니다.


심지어 생산되는 제품에는 단계까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가 먹는 '밀'이 생산되야 합니다. 따라서 '소'를 시장에 배달하기 위해서는 한 턴에 밀에서 소로 이어지는 생산 테크를 모두 소진해야 합니다.


[헬베티아]의 특이한 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울러 이런 연쇄적인 면과 생산 후 그 사용까지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쉬운 메커니즘 가운데서 꽤나 장고를 유발하게 하는 요소가 됩니다.

 

한편 [헬베티아]는 자원 생산과 소진이 선형적인 방식으로 진행 되지만, 만들어져 가는 '형태'가 중요한 게임이기도 합니다. 13종류의 자원은 배달할 때마다 1점으로 기록되고, 한 번 배달한 자원은 새롭게 배달할 수 없습니다. 점수를 낼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좁죠. 그러나 배달된 자원들의 내역이 어떤 지정된 그룹을 만들도록 이어지게 배달할 수 있고, 이런 특정한 그룹의 연결을 제일 먼저 달성한 플레이어는 추가 점수를 얻게 됩니다. 배달하면 장땡인 자원이지만 그 자원들도 무작정 배달하는 것이 아닌, 순서와 형태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죠.


건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일로 만들어가는 건물들은 중앙 부분에 해당되는 마을회관에 덧붙여지게 되고, 건물 타일로 마을 회관을 제일 먼저 둘러 쌓은 플레이어는 지정된 점수를 받게 됩니다. 아울러 건물의 위치에 따라서 일할 수 있는 일꾼의 효율성도 좌우되기 때문에 만들어가는 순서 역시 중요하게 여겨지죠.


돌아가며 정해진 액션 포인트를 쓰는 방식 역시 전형적입니다만, 라운드의 종료가 모든 플레이어들이 액션 포인트를 다 쓰는 시점이 아닌, 어느 한 명만 아직 쓰지 않은 액션 포인트가 남았을 경우이기 때문에, 다른 플레이어들이 잔여 액션을 다 쓰기를 기대하며 눈치를 보는 플레이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결혼과 출산 시스템도 아주 드문 방식은 아니지만 [헬베티아]에서는 무척 독특하게 진행됩니다. 주교 액션을 선택한 플레이어는 성년이 된 일꾼 하나를 상대방의 지역에 결혼시킬 수 있습니다. 자식을 결혼 보낸 상대방 집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효용성은 있지만, 상대방 마을에는 출산을 통해 추가 일꾼을 허락할 수 있다는 점때문에 선택의 당위성이 떨어질 수 있는데, 이때 나의 액션을 늘리거나, 혹은 상대방이 나의 마을로 결혼하러 오게하는 '미끼' 역할이 되는 지참금 획득의 개념은 기발하기도 하거니와, 아울러 게임에 있어서 무척 중요한 요소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점수의 산정이 누적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생각보다 [헬베티아]에서 획득되는 점수의 요소들은 적은 편입니다. 제품을 배달해도 1점, 선마커를 갖고 있어도 1점, 캐릭터 타일을 갖고 있어도 1점이고 좀 더 달성 난이도가 어려운 경우에도 3점 이상을 호가하기 힘들죠. 처음 몇 라운드 동안은 아무리 열을 올리고 해도 5~6점 넘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라운드가 끝나면? 다시 0점부터 계산합니다.

그러나 라운드를 진행할 때마다 점수의 요소들이 점점 늘어가며 그 상승폭도 생각보다 크기 때문에 종료조건이 되는 20점이 다가올 수록 자잘한 점수들에 대해 민감하게 플레이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양한 변주의 요소를 많이 담고 있지만, 그 요소들이 여벌로 붙은 것이 아닌, 게임의 흐름안에 잘 녹아 있습니다.

 
반면 게임의 규칙 자체는 쉬운 편이지만 생각보다 플레이 타임은 긴 편입니다. 네 '생각보다'요. 규칙만으로는 한 시간도 안 걸릴 게임으로 보이는데, 초보자들이 플레이를 하면 2시간은 넘게 걸리는 편입니다. 진행하는 요소가 많아서가 아니라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인데요, 특히 앞에서도 언급한 자원의 메커니즘을 생각하는 액션을 하게 되면 그 연쇄 경로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플레이어의 생산 건물까지도 고려를 해야하기 때문에 장고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출산율(?)이 왕성한 게임이다 보니 라운드를 거듭할 수록 배치하는 일꾼들이 점점 늘어나는 점도 플레이 타임을 길게하는데 일조합니다.


그렇다고 아주 건조하기만 한 게임도 아닙니다. 특정 건물의 일꾼이 생산 후 '피곤해서 잔다'는 개념으로 피겨를 쓰러뜨린다던지, 출산 시에 성별 조정이 가능한 점, 깨어있거나 자고있거나 상관 없이 결혼과 출산이 가능하다는 점은 게임을 플레이 하면서 참으로 실없는 농담을 마구마구 자아내게 합니다. 이런 게임의 인상만을 따진다면 크라머의 전작인 [랭카스터]와도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게다가 수량이 많지 않되 전반적으로 큼지막한 콤포넌트들은 시원시원한 게임의 진행을 돕습니다. 다만 자원의 종류가 너무 많기 때문에, 일러스트에 있어서 이를 좀 뚜렷한 화체로 구별지어 놨어도 좋았을것 같다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이야 말로 정말 개인 차이가 있겠지만, 이번에 나온 코스모스 판에서는 자원 조차 너무 회화적으로 그려서 구별하기가 힘들더군요.

 

[헬베티아]는 규칙이나 게임의 인상에 있어서 혼합하기 힘들것 같은 요소들을 잘 버무린 작품입니다. 전작들의 동어반복이 되지 않게한 작가의 역량도 돋보이고요. 2011년 에센 페어 플레이 차트에서도 6위로 수위를 차지했죠. 하지만 독창성과 그에 맞물리는 재미를 고려한다면 그냥 6위로만 매김할 것이 아닌, 1, 2위의 게임들인 [투르네], [트라야누스] 같은 작품들과도 충분히 견줄만한 작품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