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

90초의 스피드 미학. [아이덴틱] (Identik/2010)


바야흐로 파티게임 붐입니다. 마치 만월이 된 달이 다시 조금씩 이지러지는 것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전략게임들의 러시에 이어 가볍고 쉽게 즐길 수 있는 파티 게임들이 한창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아마 최근의 붐을 선도한 게임으로는 역시 올해 SDJ 수상작인 [딕싯]을 들 수 있겠죠. 실제로도 훌륭한 게임이고요. 그 외에 올해 SDJ 후보작들로 오른 다른 게임들 중 [쓰루 디 에이지스 주사위 게임]과 [프레스코]를 제외하면 비교적 전략성보다는 간단한 파티 게임의 느낌이 큰 작품들이 물망에 올랐습니다. 저변성을 염두한 SDJ의 의도적인 선택같아 뵈기까지 할 정도에요.


[아이덴틱] 역시 올해의 SDJ 후보작 중 하나였습니다. 원래 [아이덴틱]은 2006년 브레인콕에서 나온 게임인 [포트레이얼]을 애스모디에서 재판한 작품입니다. 기발하기 보다는 일상적인 개념을 게임의 시스템으로 잘 승화(?)시킨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번 [포트레이얼]과 비교를 해보자면....


박스는 세로로 긴 [포트레이얼]에 비해 사각형태로 되어있고, 보다더 유아스러운 일러스트로 일신했습니다.




게임의 무게는 [아이덴틱]이 훨씬 가벼운 편입니다. 그 이유는....


일단 문제 출제용 그림들은 공히 120장이지만, [아이덴틱]의 경우 이 출제 그림 종이를 양면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또 종이의 재질이 [포트레이얼]보다 훨씬 가볍고 고급스런 재질이라서 여기서 무게 차이가 나는 편입니다.




혹여나 [포트레이얼]을 소장하고 있는 분들에게는 출제용 그림이 다르게 만들어 졌을까가 큰 관심사겠지만 120개의 그림은 모두 똑같습니다. [아이덴틱]으로 이 게임을 처음 접하는 분들로서는 그다지 아쉬운 일은 아니겠지만요. (아, 그러고보니 위의 사진은 어찌보면 게임의 스포일러라고 할 수 도 있겠습니다. 죄송..)




점수판과 그림 그리는 종이입니다. 오른쪽이 [포트레이얼] 왼쪽이 [아이덴틱]입니다. 차이가 확연하죠.




[아이덴틱]의 경우 뒷면은 점수표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그림 선생님이 되었을 차례와 그림을 그리는 차례가 되었을 경우의 점수를 나눠서 기재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편리하긴한데, 한 번의 게임에서 대략 한 장 정도 필요한 이 점수표가 실제로 게임을 하면 여러장을 갖고 플레이하게 됩니다. (왜냐면 그림 그리는 종이는 인원수 이상만큼 필요하므로) 어찌보면 좀 낭비같기도 합니다. 차라리 뒷면에도 어떻게든 공간 활용을 해서 그림 그리는 칸을 하나 더 넣던지.


대안책으로 그림 그리는 칸을 지우개로 지워가며 플레이 하면 그만큼 경제적이겠지만... 누군들 그렇게 할까요?




연필의 경제학. 우측이 [포트레이얼], 좌측이 [아이덴틱]입니다. 이런 짠돌이들!




타이머는 전기 타이머에서 모래시계로 바뀌었습니다. 우측의 타이머가 [포트레이얼]의 부속품인데요, 실제로 해당 타임이 되면 부저가 울려서 위압적인 느낌은 더 주긴하는데, 배터리가 갑작스레 나갈 경우가 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모래시계는 그야말로 보드게임스런 콤포넌트이지만, 시간이 다 될 경우 선생님을 맡은 플레이어가 닥달을 좀 해줘야 하겠고요. 시간은 공히 90초입니다.





[포트레이얼]과의 비교가 좀 길었군요. 어짜피 룰도 간단합니다. 플레이어들은 각자의 연필과 종이를 받습니다. 그리고 플레이어 중 한 명이 그림 선생님 역할을 맡습니다. 그림 선생님은 자신의 턴에 그림을 그리지 않고 그림을 설명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림 선생님은 한 개의 그림을 선택해서 준비된 봉투에 넣습니다. 이 봉투는 그림을 넣게 되면 하단부의 텍스트만 가리고 그림만 보여집니다. 게임이 시작되면 그림 선생님은 모래시계가 다 떨어지는 90초 이내에 이 그림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플레이어들은 일체의 질문 없이 그 묘사대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저 그림이라면 어떻게 설명 할까요? "네 명의 하녀들이 걸어가고 있는데, 앞에는 앞치마가 있고 맨앞의 아줌마가 든 주전자에서는 김이 나와서 뒤로 흐르고, 하녀들은 모두 파이를 들고 있고...."




 


90초는 완벽한 그림을 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입니다. 따라서 플레이어들은 그야말로 개발새발로 그린 그림을 선보이게 됩니다. 이 그림에서 맨앞의 하녀가 든 건 무슨 알라딘의 램프 같군요. 맨 뒤의 아줌마는 무슨 찐빵을 들고 간답니까.


E.T 들이 행진하고 있습니다.




채점시간. 그림 선생님을 맡은 플레이어는 봉투를 벗기고 그림의 하단에 쓰여진 10개의 항목을 읽어주며 각 플레이어들의 그림이 그 조건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체크합니다. 어쩔 수 없이 이 단계에서 영문으로 된 텍스트를 해석해야 하는데요, 원칙적으로는 그림 선생님이 읽어가며 체크를 해야 하지만, 부득이한 경우 해당 텍스트를 다 같이 보면서 체크해 나가도 됩니다. 다시 말해 플레이어들 가운데 영문 텍스트에 익숙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된다는 뜻이죠.


예를 들어 8번 항목에서는 하녀들의 발이 8개 모두 보여야 합니다. 9번 항목에서는 맨 앞 하녀의 주전자에서 나온 김에 정확히 앞의 세명의 머리 위에까지 덮고 있어야 합니다. E.T를 그린 플레이어는 이 항목에서 점수를 못받겠군요.



한가지 중요한 점! 채점하기 전에는 10면체 주사위를 굴립니다. 그리고 그 번호에 해당하는 항목은 특별 항목이 되어서 2점을 더 받습니다. 따라서 항목에 맞게 그리면 1점, 아니면 0점, 특별항목을 맞게 그리면 3점인 셈이죠.




그림 선생님도 점수를 받습니다. 자신이 설명한 항목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이라도 맞게 그렸다면 1점을 받아서 최대한 10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라운드가 끝나고 다음 플레이어가 그림 선생님이 되어 같은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모든 플레이어들이 한 번씩 그림 선생님을 맡으면 합산 점수를 내고 게임이 끝나지만, 필받으면(?) 여러 라운드를 돌려도 무방합니다.

 



[아이덴틱]은 파티 게임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승패의 가늠보다는 그 과정에서 웃음을 주는 게임입니다. 아무리 그림에 능통하다 하더라도 90초 내에 완벽한 그림을 그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 게임의 목표 자체가 훌륭한 그림 보다는 '정확한' 그림이기 때문에 결국 이 게임은 이해력과 묘사능력에 대한 게임이 됩니다. 따라서 가족용, 혹은 교육용 게임으로도 괜찮은 게임이 될 법합니다.


그려진 그림에 대한 공감대를 가늠하는 [딕싯]과, 그림을 그려가며 소통을 해가는 [아이덴틱]은 어찌보면 대척점과 공유점을 함께 갖고 있는 게임들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굉장히 감성적이기도 하고요.


다만 맹점도 있는 편입니다. 소모성 콤포넌트를 싫어하는 컬렉터 들에게는 늘 대안품을 함께 챙겨야 한다는 점도 들 수 있지만, 게임 특성상 한 번 플레이 한 게임에 대해서 리플레이성이 떨어진다는 점이 치명적이긴 합니다.


하지만 [아이덴틱]의 포함 그림은 무려 120장. 5인플을 한 라운드를 한 판으로 기준한다면 무려 24판을 플레이 할 수 있는 분량입니다. 아마 그 24판을 플레이 하는 동안의 즐거움은 충분히 제 몫을 하고도 남겠죠. 그런 점에서 [아이덴틱]은 정말 귀엽고 또 유쾌한 게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