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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웅장한 성화를 그려가는 예술 [프레스코] (Fresco/2010)


대부분의 게임 디자이너들은 테마보다는 시스템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고 합니다. 테마를 가미하는 것은 다음의 일이란거죠. 게임의 테마가 플레이어들을 끄는 매력 요소인 것은 사실이지만, 테마와의 적절한 결합과 재미가 그 못지 않게 중요한 사실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2010년 독일 게임상 (DSP)에서 1위를 차지한 [프레스코]는 흔히 볼 수 없었던 미술이라는 테마와 게임의 내용이 잘 결합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게임이기도 합니다. 보드의 구역별로 정해진 일을 수행하는 방식인데 그 각각의 액션이 그다지 어려운 편이 아니라서 규칙 숙지의 진입장벽도 낮은 편이었고요. DSP1위는 아마도 재미와 보편성을 두루 고려한 것에 대한 답지였겠죠.


플레이어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가 되어 대성당 벽화의 그림을 그리고 점수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물감을 사야하고, 물감을 사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합니다. 아울러 적절한 색깔을 만들기 위해 물감을 공방에서 섞어야 합니다. 여기서 플레이어들은 대화가이고 실질적으로 일하는 것들은 그들의 문하생들이라는 설정이 생깁니다.



시장


첫번째 장소는 시장으로 이 곳에 가서 물감을 사와야 합니다. 대부분은 빨강, 노랑, 파랑의 기본색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서 구입한 타일의 조합대로 큐브를 가져가고 그게 그대로 물감이 됩니다.  두번째 장소는 대성당으로 이 곳에서 프레스코를 그리게 됩니다. 보드위에 이미 완성된 그림을 여러 타일로 덮어 놓고 덮혀진 타일과 맞는 물감의 조합을 내면 그 타일이 제거되면서 그림이 조금씩 완성되는 설정이죠. 물론 그림을 일부분 완성할때마다 제일 중요한 점수를 얻게 됩니다.


대성당




공방에서 물감을 섞기



세번째 장소는 저자거리로 이곳에서 문하생들은 초상화를 그려주고 소정의 탈러(돈단위)를 수익으로 얻습니다. 물론 이 수익이 요긴하게 쓰이는 곳은 물감 구입을 위한 시장이죠. 네번째 장소는 공방으로 시장에서 원색 위주로 갖춘 물감을 이곳에서 섞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프레스코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혼합색 물감이 필요하기 때문에 공방은 아주 중요한 장소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 장소는 극장입니다. 바삐 그림을 그려야 할 판에 연극을 구경하는 장소가 웬지 생뚱 맞아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중요한 코스이기도 합니다.




일찍 일어나기. 아니면 아예 늦게 자기



모두 다섯가지의 구역이 있고, 시장과 대성당은 먼저 투입되는 순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나머지 세군데는 순서와 전혀 상관이 없지만, 처음 두 군데의 플레이 순서는 게임을 가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프레스코]에서는 이 순서 결정을 각 플레이어의 '기상시간'으로 정합니다.  새벽 5시부터  8시까지 각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기상순서를 정합니다. 빠를수록 좋지만 그만큼 물감 가격이 비싸고, 너무 일찍 일어난 탓에 컨디션이 다운되는 불이익도 있습니다. (아침형 인간이 아닌 분들에게는 너무나 크게 공감가는 얘기겠죠)


극장



따라서 선을 잡은 플레이어들은 그 만큼 돈을 벌어 물감 구입에 애로사항이 없도록 해야하고, 5번째 구역인 극장에도 가서 컨디션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만약 컨디션이 지나치게 낮아지면 사용할 수 있는 문하생이 한 명 줄기 때문입니다. 턴 순서를 위한 기상시간의 개념은 [프레스코]의 가장 유쾌한 요소일 겁니다. 공감대가 형성되는 설정이라고나 할까요? 순서 준수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되고 그만큼 게임의 몰입도와 재미도 크게 배가시켜 줍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각 지정된 구역에 매번 몇 명의 문하생들을 투입시키기로 하느냐의 설정입니다. 매 라운드가 시작되기 전 플레이어들은 다섯명 (컨디션에 따라 여섯명 혹은 네명)의 문하생들을 5지역에 배치해야 하는데, 각 지역에는 최대 3명가지 배치할 수 있으므로 투입할 공간은 모두 15군데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앞서 얘기했던 순서가 중요한 구역에서는 나름 눈치싸움도 생기기 때문에 문하생 배치는 비공개로 진행됩니다. 결국 턴순서 결정, 문하생 배치, 공개 그리고 순차적인 수행으로 진행을 해나가면서 플레이어들은 프레스코를 완성하며 점수를 획득해 갑니다.


 


주교님이 보고 계셔...



[프레스코]에서 테마와 맞물린 설정의 화룡정점은 바로 대주교입니다. 프레스코 완성을 위해 타일을 획득시 점수를 얻게 되는데, 이때 완성된 공간에 대주교 마커가 있다면 추가로 3점을, 인접한 지역에 있다면 2점을 더 얻습니다. 그야말로 '주교님이 보고 계실때 완성을 했으니' 더 칭찬을 받았다는 맥락이겠죠. 이 기발한 발상은 주교를 이동, 아니 움직이도록 해드리는 것이 1탈러의 돈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묘한 아이러니(?)를 자아내기도 합니다.

게임 보드 위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지만 어느정도 익숙해지면 약간은 지리한 반복이 되는 게임이기도 합니다. 간단한 규칙은 그만큼 보편적인 호응을 얻는데 일익을 하기도 했지만, 여기서 뭔가 좀 더 나올법한데 하는 전략적인 부분은 빈약해지는 양날의 검이 되었죠.


놀랍게도 [프레스코]는 본판 안에 3종의 확장 팩이 기본으로 들어 있어 이런 점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저자거리에서의 초상화 아르바이트를 보강한 초상화 확장, 물감 섞기 단계에서 좀 더 도전적인 미션을 해볼 수 있는 주교의 의뢰, 그리고 색깔 혼합을 더욱 복잡하게 하는 특별한 혼합색 확장은 일단 익숙해지면 기본 규칙에 자연스레 어우러져 게임을 더욱 다채롭게 합니다. 특히 '특별한 혼합색' 확장은 [프레스코]라는 게임이 갖고 있는 본연의 전략성을 더욱 넓힌 느낌을 주는 확장입니다.

 

물론 여기서 끝은 아닙니다. 제작사인 퀸 게임즈는 곧이어 [유리공 확장 (Glazier)]과 [두루마리 (Scroll)] 확장을 발표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본판에 수록된 3종 확장에 이은 4,5,6 번 확장을 자처하고 있으니 공식적인 면면으로 따지면 모두 7개의 확장이 발표된 겁니다. 그나마 기본판에 합쳐진 것이 있고, 또 3개는 합본이니 다행이라고나 해야할까요. 얄미운 점은 추가 확장들 역시 상당히 괜찮다는 점입니다. 기본판의 포함 확장이 각 구역의 규칙 자체를 확장 시켰다면, 추가 구매 확장들은 아예 새로운 구역을 첨가하면서 게임이 다루는 방식 자체를 넓히고 있습니다.



맵확장이 아닌지라 무한 확장에는 한계가 있을 법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나온 확장들이 제법되고 마치 완전한 버젼에서 일부 요소를 결실시킨 것이 기본판으로 나온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확장들의 상성은 잘 맞물리는 편입니다. 이런 면면에서 초심자들에게 기본룰에서 확장을 덧붙여 가며 심플한 발상의 게임이 점점 복잡성과 전략성을 갖춰가는 면모를 보여주기에도 좋습니다. 지도 확장처럼 선형적인 확장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겠죠. 물론 테마가 테마이니만큼 군침이 돌법하게 깔끔한 콤포넌트들도 여기에 한 몫을 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미술과 관련된 테마가 보드게임 계에서 전무했던 것은 아니지만, [프레스코]는 테마와 진행이 잘 맞물린 게임성과 평단, 그리고 상업적인 성공으로 소재와 방식이 공히 화제의 반열에 동반상승한 작품입니다. 우리가 열람할 수 있는 보드게임의 요소들을 두루두루 튼실히 갖췄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한동안 스테디 셀러가 될 법합니다.